2012년 임진년(壬辰年)은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스님 입적 100주년을 맞는 해. 그와 만공스님의 선맥을 계승한 혜암, 벽초, 원담스님이 방장으로 총림을 이끌어온 덕숭총림 수덕사로서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 연말 방장 설정스님의 지도로 주지 지운스님을 추진위원장으로 하는 ‘경허선사열반100주년기념사업회’를 구성, 서울 조계사 인근에 사무실을 내고 다양한 사업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설을 10여일 앞둔 지난 1월9일 방장 스님의 덕담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설정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수덕사 정혜사를 찾았다.
동안거 결제기간이었지만 방문한 날이 결제 대중들이 목욕하고 청소를 하는 날이라 일반 대중들의 발길도 간간이 이어졌다. 연초부터 계속된 추위에 눈바람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라 건강이 염려됐지만 스님의 걱정과 아쉬움은 다른 데 있었다. 사흘 전 해인사에서 영결식을 갖고 떠나보낸 전 총무원장 지관스님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외적인 환경에 끄달려 힘들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세상법…평소 신념과 원력
열성과 성실성만 있으면 기회는 언제든지 옵니다
“영결식장이 추워야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교단의 소중한 분을 떠나보낸 허전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열성적으로 배우고 배운 것을 후학들을 위해 가르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이(理)ㆍ사(事)를 겸비한 대석학으로 금석문의 대가라는 것도 잘 알지 않습니까.
불교경전에도 능통해 한국 현대불교사에 없어서는 안 될 큰 보배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떠나고 빈자리가 큰 사람이 있는데 지금이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념사업회 등을 통해 앞서간 선지식의 정신과 가르침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 등도 그런 빈자리를 조금씩 메워가는 행보 중에 하나가 아닐까. 스님은 수덕사 주지 스님을 비롯한 총림 대중, 문도 스님들이 경허스님 열반 100주년 기념사업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깊은 신뢰를 보이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스님은 2008년 종단의 불학연구소와 함께 ‘경허ㆍ만공 선사의 선풍과 법맥’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를 함께 이끌며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스님은 한국불교에 있어서 선(禪)의 역사를 ‘참교육의 역사’, ‘참 생명의 등불을 전해주는 역사’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조선조 500년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척불(斥佛)로 인해 불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혜성같이 출연한 경허 선사는 한국불교의 희망이었습니다. 사부대중에게는 참으로 크나큰 기쁨이었고, 한국불교의 중흥을 염원했던 민생들에게도 스님의 존재는 그 자체로 큰 가르침이자 살아있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경허 선사의 진면목(眞面目)을 알지 못하고 스님에게 마치 문제가 있는 것처럼 폄하하는 분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께서 반본환원(返本還元)해서 입전수수(立廛垂手)하신 경허스님의 승행(勝行)을 짐작이나 했을지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허스님이야 말로 시비(是非), 염정(染淨), 생사(生死), 승속(僧俗)이 다 끊어진 절대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그 당체였습니다. 범부의 견해로 큰스님의 그 깊은 진리를 감히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일부 인사들에 의해 경허스님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을 이번 기회에 바로 잡겠다는 강한 의지도 보였다. 경허스님의 출가-수행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세세한 언급도 그런 차원이었다.
“경허스님께서는 ‘법문가(法門歌)’ ‘무상가(無常歌)’라든가 ‘참선곡(參禪曲)’, ‘중노릇하는 법’ 등의 게송을 지으셨습니다. 이들 게송들은 국한문 혼용 또는 언문, 한글로 지은 것입니다. 오직 한문에만 젖어서 한문 아니면 학문하는 사람이라고 일컫지도 못했던 시절, 스님의 이같은 시도는 감히 상상조차 못하던 일입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이런 노래를 지으신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문자를 모르는 중생들에게까지 부처님 가르침을 일러주고 그들에게도 참다운 생을 열어주겠다는 스님의 간절한 원력의 발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에만 머무르지 않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위해 온몸을 바친 가장 가까운 사례를 우리는 경허스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기 위한 해인사에서의 간경도감 등의 행보도 그 가운데 하나.
“스님은 선(禪)만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스물세 살에 강사가 되어 대중을 가르쳤습니다. 깨친 후를 봐도 그렇습니다. 스님은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해인사와 범어사에 계셨습니다. 그때 해인사에서는 간경(刊經) 불사를 했는데 그때 스님께서 증명(證明), 조실(祖室)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의 화엄법회는 또 어땠나요? 법회 때 스님은 <대방광불화엄경>의 ‘대(大)’ 한 글자로 무려 일주일간 법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설통(說通)과 종통(宗通)이 되지 않는 분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으로 비춰볼 때 스님은 선(禪)과 교(敎)를 넘나들며 중생을 교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님은 승속을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글대로 입전수수(立廛垂手), 이류중행(異類中行)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몇 년 전 덕숭산 밑에 있는 마전리라는 동네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갔더니 90세 가까운 노인들이 이런 얘기를 전해줬습니다.
경허스님께서는 옛날에 호열자(虎列刺, 콜레라)라고 하는 염병이 돌았을 때 그 마을에서 2개월 동안 계시면서 그들을 위해 쌀을 탁발해다 밥을 해 먹이며 그들을 돌봤다고 합니다. 저는 반야 지혜를 증득하게 되면 무차대비심이 나오게 된다는 것, 지혜와 자비가 결국 둘이 아니라는 것을 경허스님의 이같은 실천행을 통해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과감히 내던질 수 있는 ‘현애살수(懸崖撒手)’의 결단을 느끼게 해주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경허스님을 말하고도 남는다는 것. <금강경>에서 말씀하는 네 가지 상(四相)을 이미 놓아버린 진정한 보살, 대자유인이 바로 경허스님이라는 점을 제대로 알고 스님이 대중과 함께 하며 보여주었던 그 소탈한 모습 또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 일이 바로 올해부터 덕숭산 대중들이 종도들과 함께 해나가야 할 사명이라고 스님은 설명했다.
경허선사 열반100주년 맞아 스님의 생사·승속을 초월한
무애자재한 본모습을 종도들과 함께 정립해 갈 것입니다
양력으로 새해가 시작된 지 오래지만 스님은 또 다른 새해의 의미가 있는 설과 입춘을 앞두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이 급변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상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어려움과 희망적인 것은 늘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어려운 현실 속에 ‘나 자신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원인은 외부 환경적인 것도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란 점을 늘 잊어서는 안됩니다. 너무 외형적인 것에 끄달리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보면 덜 어려울 것입니다.”
스님은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영국 속담으로 이해를 도왔다.
“재물을 잃은 것은 적게 잃은 것이다, 건강을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다,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다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렵다고 스스로 내팽개쳐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소 열성만 갖고 있으면 삶의 길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전개된다고 봅니다. 자기 내면에 충실하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는 말입니다.”
불자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인연법’은 새기고 또 새겨 봐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라며 자리를 정리해갔다.
“세상법은 인연법이니 (인연을) 그냥 내버려두면 잘 안 찾아옵니다. 인연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예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세상법이거든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신념과 원력, 열성과 성실성만 있으면 언제든지 기회가 온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인연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일수록 더 좋은 인연,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불을 붙여야 불을 피울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고 늘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살아가길 바랍니다.”
동안거 해제를 즈음해 스님은 형식보다는 내용에 더 충실해야 함을 강조했다. 일반 사회인들을 위해 불교가, 수행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그들의 눈높이를 모르고서는 자기 혼자만의 수행에 그치고 만다는 것.
지금 종단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성과 쇄신을 위한 결사 또한 수행자가 여법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그 모습이 회복될 때 제2, 제3의 원효 경허 만공이 나올 것이며 스님의 일생 또한 그를 위한 걸음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제 어느 길을 갈 것인가. 덕숭산에서 내려오는 결제대중들은 누구보다도 더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길을 찾아갈 것 같은 날이었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풍을 진작시킨 경허.만공스님의 선맥을 계승한 혜암, 벽초, 원담스님에 이어 제4대 덕숭총림 방장으로 덕숭산을 찾는 납자들을 제접하고 있다.
설정스님은 1955년 수덕사에서 전 방장 원담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5년 혜원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61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서울대 원예학과를 졸업한 수재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해인사 강원을 마친 뒤, 부산 범어사와 문경 봉암사, 예산 수덕사 등 제방선원에서 반세기 동안 수행했으며 수덕사 주지를 비롯해 조계종 개혁회의 법제위원장, 제11대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했다.
중앙종회 의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봉암사 태고선원과 수덕사 정혜선원 등지에서 한철도 빠짐없이 방부를 들여 정진, 이(理).사(事)에 걸림이 없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08년 입적한 원담스님의 뒤를 이어 2009년 덕숭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조계종 법계위원으로 지난 2011년 종단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 화계사 조실을 겸임하고 있다.
[불교신문 2789호/ 2월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