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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사랑합니다..사랑합니다..

-예산읍 발연리 신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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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어제 28일의 일입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가족을 하나 잃었습니다. 15년 이상이나 아래인 막내 남동생의 아내가 세상을 등진 것입니다. 6형제의 맏딸로 환갑을 바라보는 우리 시어머니는 크게 충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짐작하는 어투로 이야기를 하느냐면 시어머니는 이제 시집 온 지 1년밖에 안된 며느리에게 불미스러운 가족사를 드러내놓고 싶어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008년 11월 지금의 남편을 만나 불같이 사랑했고, 그 다음해 2월에 예비 시부모님을 만나뵈러 갔습니다. 시아버지는 얼굴에 ‘나 참 착해요’라고 써있는 아주 온순하신 분이셨고, 시어머니는 TV에 자주 나오는 어느 중년 여배우를 쏙 빼닮은 미인형인데 성격이 아주 불같으셨습니다. 남편 쪽은 식구가 참 단촐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외동아들이신데 시아버지의 아빠..그러니까 남편의 할아버지는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끌려가신 후 그 뒤로 만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창 나이셨던 할머니는 시아버지를 혼자 키우시며 고생고생 하시다가 제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시아버지의 형제분이 없어서 다 해봐야 남편 쪽 가족은 4명 뿐 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연이란게 참 신기했습니다. 남편은 할머니를 무척 사랑했는데 저를 보면서 가끔씩 할머니의 말투나 행동들이 보인다며 깜짝 깜짝 놀라곤 합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저는 같은 평산신씨이며 족보를 따져보면 아주아주 먼 친척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농담삼아 제가 늘 남편에게 하는 말이 “할머니가 오빠를 지켜주라고 나를 보내주셨나봐. 나는 수호천사야..” 그럼 남편은 그 말이 진짜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는 불같은 성격 때문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주 많이 다투셨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하나뿐인 며느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셨는데 시어머니는 할머니와 조금만 트러블이 생겨도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것을 많이많이 후회하고 있지만요...

지난 3월에 시어머니의 57번째 생일을 맞아, 그러니까 결혼하고 처음 맞은 시어머니의 생신을 잘 챙겨드리고 싶어서 이것저것 준비하려 했는데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셨습니다. 말을 안 들으면 또 불같이 화를 내실까봐 그럼 식사대접을 하는 것과 조그마한 선물을 사 드리는 것으로 합의를 봤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이렇게 가족들끼리 외식다운 외식을 해본것이 처음이라는 것을...남편이 올해 33살이니까 33년 만에 처음인거죠. 생일케익에 초를 꽂고 생일축하 노래를 듣는 것도 처음이라고 하십니다. 아들이 둘 있는데 그동안 생일케익에 초 꽂고 노래한번 불러주지 않았던 거죠. 선물로 사 드린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도 한방 박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며 며느리 잘 둬서 이런 대접도 받아본다며 행복해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할머니께 이런 대접 한번 못해준 것이 한이 된다며 대신 할머니에게 받았던 무한한 사랑을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인 저에게 다 주신다고 하십니다. 저는 속으로 결심했죠. ‘어머니, 아버지!! 제가 딸 노릇까지 다 할게요. 어머니, 아버지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지난 5월 달에 결혼하고 1년 만에 임신이 되었습니다. 너무 기다려왔던터라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지요. 그런데 7주만에 우리 아가를 하늘나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심장이 멈춰버려서....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든 가운데 시어머니가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임신했다고 한날 꿈을 꿨는데 그 꿈이 그렇게도 불길하고 안좋았다며 손주를 기다리긴 했지만 임신했다는 소리가 반갑게 들리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모두다 털어버릴 순 없었지만 그래도 시부모님께서 저의 건강과 마음상태를 더 걱정해주시니 참 감사했습니다.

그리곤 어제, 시댁에 안부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간밤에 꾼 꿈이 느낌이 좋지 않아서 전화를 들었다가 놨다가 하기를 몇 번.. 결국엔 안부전화를 안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좋은 일이 생겨버렸던 겁니다.

시어머니의 막내 남동생, 그러니까 남편의 막내 외삼촌에게는 중학생인 자폐아 딸과, 초등학교 4학년인 딸, 그리고 1학년인 아들이 있다고 합니다. 결혼식때는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왔다 갔는지도 몰랐는데 어제서야 결혼식 사진을 꺼내놓고 찾아보니 막내 외삼촌과 외숙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결혼식 때 눈인사 정도는 했겠지요. 한번 스쳐 지나가기도 했겠지요. 서로가 잘 알 수 없었으니 그렇게 잠시잠깐을 지나쳤건만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하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가족이란 것이 이런것인가 봅니다. 세상을 등진 외숙모가 가엽기도 하고, 남겨진 3형제가 가슴에 밟혀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냅니다. “초등학생 4학년 딸 아이라도 우리가 데려다가 당분간만이라도 키워 주는 건 어떨까...”

저는 선뜻 대답했습니다. “1학년짜리는 어쩌고...데려오려면 둘 다 데려와야지. 데려오자..나는 괜찮아.” 퇴근하고 현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두통이 너무 심하다고 약을 찾던 남편은 나의 이 한마디에 두통이 싹~사려졌다고 합니다. 뜻하지 않은 유산으로 어렵게 가진 우리 아가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그렇지 않아도 적적했던 나에게는 오히려 더 큰 선물인데 말입니다.

 

남편이 시어머니께 전화를 합니다. “초등학생 아이 둘은 당분간이라도 우리가 키울게..” 시어머니는 지금 당장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말씀하시지만 가슴을 쓸어내시며 연신 고맙다고 하십니다. 직업 특성상 밖으로 많이 돌아다니시는 외삼촌을 대신해 형제 중 그 누군가는 도움의 손길을 줘야 한다면 맏딸인 시어머니께서는 그냥 못 넘어가실테고, 시어머니도 힘드신데 차라리 젊은 우리가 맡는게 더 나을거라 생각해봅니다. 제가 유산했을 때 그렇게 격려해주시고 위로해주시던 시어머니의 사랑을, 불같으시지만 여리고 여린 천상 여자인 우리 시어머니를 지금은 하나뿐인 며느리인 제가 위로해 드려야 할 때라고 생각이 듭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며 남편에게 비밀로 하자 하셨던 시어머니는 저의 의외의 반응에 말없이 눈물만 흘리십니다.

토닥토닥 우리 시어머니....

 

“어머님! 할머니께 받은 사랑을 며느리인 저에게 고스란히 사랑으로 물려주실거라 하셨죠? 그 말씀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느껴요. 어머니께서 저를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만큼 저도 나중에 나중에 제 며느리에게도 어머님의 사랑을 고스란히 물려줄게요. 사랑합니다...사랑합니다..사랑합니다..”

 

오늘과 내일 장례 절차 후 의논될 아이들의 거취..이제 서른살인 내가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 두 아이의 엄마노릇을 한다는게 처음엔 어색하기도 하겠지만, 어머님께 받고 있는 사랑을 나눠주며 잘 키워주고 싶습니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 한번 제대로 섞은 적 없지만 우린 가족이니까요.

 


아빠의 소중한 발이 되어 주는 아들

 

저에게는 대한민국 이라는 아들만 둘이 있는데 유독 작은 아이는 아빠를 챙깁니다.

밥을 먹어도 기다렸다가 밥그릇을 치워주고 아무리 좋아하는 게임을 하다가도 민국아 하고 부르면 자동적으로 달려가서 커피를 타주고 재래식 화장실이 위험하다고 밤에는 꼭 따라 나가서 보초를 서는 우리 아들은 아빠가 힘들지 하고 물으면 그래도 아빠 아플 때 보다는 어려운 생활에도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어린나이에 형보다도 더 철이 들은 각은 아들 제가 일하는데 힘들다고 아빠의 심부름은 자기가 한다는 우리 아들은 정말 아빠의 다리가 되어 줍니다.

그래서인지 남편도 작은 아이가 학교에 가면 밖을 내다보며 말은 안하지만 기다리는 눈치다.

그리고 한번은 같이 식당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쪽 발로 들어가는 남편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나는 얼른 자리에 가서 앉아있는데 그래도 아이는 아빠를 부축해주고 방석까지 놓아 준다.

내가 아빠가 없을 때 조금 창피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오히려 묻는 엄마가 이상하다며 우리 아빠가 저렇게 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자기는 하나도 창피하지 않다고 말하는 우리아들을 보며 순간 내가 더 창피해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아빠를 챙기며 환하게 웃는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지난 시절 아빠가 아플 때의 아이들이 힘들어하던 일을 그때는 정말이지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은 생각에 말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나도 아이들도 하루하루를 살았다. 2005년부터 예고 없이 찾아 온 남편의 변명은 잘 들어보지도 못한 희귀성 난치질환인 버거스 라는 혈관장애 병이었습니다.

의사말로는 발가락을 절단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하는데 쉽게 결정을 못하고 저는 무엇인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다른 대학 병원도 여려 군데 다녀 보았고 원주에 있는 대학병원서 혈관 이식 수술을 받고는 어쩌면 나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며 고통도 참았지만 문제는 집에서의 치료가 시작되면서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장 강한 진통주사 말기 암 환자를 맞는 진통제를 맞았는데 하루아침에 주사를 끊고 약만 먹으니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면 혹시 아이들이 들을 까봐 남편은 문을 잠가놓고 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울고 그래도 힘들면 나에게 하는 말이 여보 나 좀 어떻게 해줘 다리 좀 잘라줘 하고 말하는 남편을 그져 바라보고만 있어 야하고 나로서는 어떻게 해줄 수 없어 괜히 화도 내고 한편으로는 발과 발가락이 썩어 들어가는데 얼마나 아플까 어쩌다 젊은 나이에 저런병에 걸려 고생하는 남편이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며 나 자신도 지치고 아이들도 잘돌보지 못하니 공부를 잘하던 둘째 아들도 점점 성적이 떨어지고 큰 아이는 말수가 줄어들고 아빠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남편의 몸은 점점 더 마르고 발은 점점 더 검은 색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운지 수술을 받자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아팠지만 작년 겨울에 절단 수술을 받았습니다.

조금 더 빨리 결정을 내렸으면 그러면 아마도 무릎 위까지 절단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하는 후회도 되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갑자기 젊은 나이에 다리 한쪽을 절단해서 우울증이 올 수 있다고 옆에서 신경을 써야 한다고 해서 눈앞이 캄캄해하지만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발병하기 전에는 남편이 젊다고 보험도 안 들어 계속 되는 병원비에또 아이들은 무엇을 해서 키우나 하는 생각에 모든 것이 걱정과 나의 짐이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힘을 내니 남편도 별 걱정 없이 상처도 아물었고 모든 상황을 잘 받아 들여 몸도 많이 좋아지고 퇴원 후에는 무상으로 살 수 있는 진집에 우리가족이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직장에도 다니게되었고 남편은 일은 하고 싶지만 쉽게 직장이 잡히지 않으니까 조금이라도 생활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하루 종일 부업을 하고 이제는 모든일이 잘 풀리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우리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겨울부터 한쪽 남은 다리마져 상처가 나기 시작하여 또다시 힘든결정을 내리고 이제는 두 다리를 모두 절단하고 퇴원 후 집으로 왔을때 찾아오는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또 자신의 처한 상황에 남편은 우울증이 시작되어 말도 안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가 일수였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나와 아이들은 정말가슴이 아프고 속도 상하고 미운 생각도 들었다가 또 불쌍하기도 하고 나또한 마을 잡기가 어려웠다. 이런 나를 다시 힘내서 살 수 있

게한 것은 가족간의 사랑의 사랑 이었다.

우리 작은 아들이 보여주는아빠에 대한 사랑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아빠의 변기를 비우는 일이다. 하지만 한번도 투덜대거나 안한다고 한 적이 없다. 이런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든든하고 대견하다.

큰아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아빠를 차 있는 곳까지 업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한참을 나가야 있는 화장실 밤에는 무서워 서로 같이 다니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아이들 이제는 다리를 잃고 가진 것도 많지 않지만 어쩌면 우리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은 것 같아 한결 마음이 행복합니다.

사람이 위를 보고 살면 끝도 없고 자세히 보면 또 사연하나 없는 사람 없듯이 그래도 우리 남편보다 더한 사람도 있는데 이정도 쯤이야 하며 힘내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라디오를 들으며 열심히 부업을 하고 있을 당신 한쪽 다리만으로도 그렇게 우리 옆에 있어줘서 고맙고 우리 아들은 커서도 그렇게 든든한 아빠의 다리가 되어주었으면 우리 남편, 대한민국 우리 아들 아자 아자!! 우리

가족의 한결 같은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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